중남미 여행 - 8일 차 ; 페루
그렇게 걱정하던 일이 터져버렸다. 아침에 눈은 떴는데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팠다. 마추픽추로 가기 위한 벤을 타는 데까진 아직 1시간, 누워있을까 하다가 그래도 늦지 않게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하려고 한 순간 필름이 끊겼다. 눈을 떠보니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 고산지대에 적응도 안 했는데 어제 맥주를 마셔서 그럴까, 아무래도 고산병이 심해진 것 같다.
정말 고민을 많이했다.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무리하지 말고 돈을 더 들여서 쉬었다 오후 기차를 타고 넘어갈까... 하다가 결국에는 다시 돈 생각에 가누기도 힘든 몸뚱아리를 어떻게 결국 일으켜 물만 끼얹고 미팅 포인트까지 갔다.
인사를 나누고 차에 타 고대로 3시간정도를 졸면서 갔다. 나를 제외하곤 그 벤에는 모두 외국인에 다들 동행이 있는 건지 내가 잠을 자든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중간에 작은 매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잠만 잤다.
벤을 타고 마추픽추를 가는 투어는 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지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그래도 불편하게나마 잠을 계속 청해서 그런지 아픈 머리가 좀 나아졌다. 바깥공기를 잠깐 쐬고 화장실을 들리니 머지않아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투어 기사랑 싸우기 시작했다. 왜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로 인해 30분은 더 지연됐다.
어찌저찌 그 사단이 끝나고 난 뒤 몇 시간을 더 달리니 벤의 종착지인 '이드로 일렉트리카'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3시간을 걸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냥 3시간을 더 걸어서 가면 되는 줄 알고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다. 근데 막상 도착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 외국인에게 말해 같이 동행해도 되겠냐고 물어 같이 갔다.
이제 보니 그 외국인이 아까 투어 기사랑 싸운 사람이었는데, 왜 싸웠냐고 나중에 물어보니 그 사람들은 투어를 신청할 때 런치를 포함시켰는데, 와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자기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해 경찰을 부르겠다라며 싸웠다고 알려줬다. 스페인어가 미숙해 경찰 얘기가 나왔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내부 사정을 아니 이분들도 정당한 이유로 화를 내신 거였다.
외국인들과 동행해 길을 따라가니 얼마 되지 않아 마추픽추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km가 안 나와있어서 물어보니, 히드로 일렉트리카에서 마추픽추 전초기지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는 12km가 된다고 했다. 정말 걸어서 한 3시간이 걸릴 거리였다.
확실히 마추픽추가 쿠스코에 비해 고도가 낮은 편이라 걷기 시작할 때부턴 머리가 아픈 게 많이 사라졌다. 아니면 마추픽추의 정기를 받는 덕일까... 기찻길을 따라가는 동안 보이는 풍경도 정신이 맑아지는데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벤이 지연돼서 거의 해가지려고 할 때쯤 마추픽추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마추픽추를 가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마을이라고 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오히려 전설 속 마을에 온 것처럼 장엄하고 분위기 있었다. 안개 낀 산맥, 거기다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까지.. 정말 이 작은 마을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자체에도 엄청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금세 저녁이 되었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물가가 비싸단 얘기를 들어 퍽퍽한 빵과 잼을 사 와서 먹었는데, 막상 돌아다녀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물가가 비싸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혼자만 아니었다면 돈 조금만 더 써서 밖에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나중에 얘기를 들었는데,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가격보다 맛이 없어서 잘 안 사 먹는다고들 한다.).
바깥공기도 쐴 겸 나와 마을 구경을 좀 했다. 페루는 특이하게도 담배를 한 개비씩도 팔았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담배를 하나 사서 물었다. 확실히 아침에 엄청난 고생을 해서 그런지 고산에 적응이 다 된 듯 담배를 펴도 멀쩡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피시방도 보였다. 마추픽추 전초기지에 피시방이라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한참을 뒤에서 구경하다가 내일 새벽 5시에는 기상해야 해 그만 일찍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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